자연스러운 표정얻기
한해 두해가 자꾸 가면서 그 많던 취미는 하나둘 줄어들게 되어 몇 안남은 것 중에 하나가 사진이다. 대가가 되겠다고 전국의 유명 출사지를 찾아 돌아다니는 정도는 아니지만, 잘 찍은 사진을 보면서 이건 어떻게 찍었나 나름 분석도 하고 내셔널 지오그래피 과월호를 가끔 사는 애호가 정도라 해두자.
그래도 고수를 쫓아 출사도 다니고 꾸준히 관심 가진 덕에 여행지나 모임에서 사진을 찍어야 할 일이 심심치 않게 있다. 그런데 막상 찍어 놓고 보면, 표정들이 하나같이 어색하다. 그렇게 자연스럽던 표정들이 카메라 앞에만 서면 한결같이 묘하게 경직된,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특유의 표정으로 바뀌고 만다.
아무리 카메라의 성능이 좋아진다고 해도 구도와 구성까지 자동으로 해 줄 수는 없으며,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델의 표정까지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노릇이다. 덕분에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 첨단 카메라가 보급된다 한들 프로 사진사라는 직업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확실히 고수들 사진 속 모델의 표정은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표정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언제부터인가 깨닫게 된 것은 사진 속 모델들의 표정과 포즈는 사진사 그 자신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사진 속 모델이 얼마나 쭉쭉 빠졌나 보다 사진사는 어떤 사람인지, 촬영장의 분위기는 어땠을지, 그리고 모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건네었을 소소한 이야기 같은 것들이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밝게 웃은 모델의 표정에서 사진사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모델의 익살스럽게 표정에서 사진사가 재미있는 사람이겠구나를 알 수 있다. 이제 긴장하고 약간은 겁에 질린 듯한 모델의 표정을 보면 그녀가 단지 짧게 입어 추워서가 아니라는 것도 어느 정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사진이 모델을 찍는 것 같지만 동시에 사진사 자신을 찍는 것이기도 하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필자가 알고 있는 인물사진의 대가들은 하나같이 격의 없고 익살스럽다. 일정 수준이상의 자연스러운 인물 사진을 얻고 싶다면, 카메라를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사 본인의 성격이나 외모를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사진 1> 레게 머리에 몸 여기저기 문신을 한 사진작가 김중만. 이런 범상찮은 외모 덕분에 그는 연예인이건 저 멀리 아프리카 원주민들이건 긴장을 풀고 친구처럼 격의없이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범상치않은 사진을 얻으려면 그 자신도 범상치 않아야 하는 것이다.
독서의 지겨움
시중에는 수십여 권에 달하는 글쓰기 책이 있고 필자도 수년째 관련한 컬럼을 쓰고 있지만, 하품과 한숨이 나오는 지루한 글들은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필자 나름의 사정 탓이기도 할 것이다. 글 좀 알아먹게 쓰라고 책도 내고 강연도 해놓고 보니 그쪽으로 감각이 예민해져서 조금만 부족한 글을 봐도 도통 참을 수가 없다.
‘시작부터 이렇게 지루한 이야길하면 어떻하나. 책값으로 만오천원이나 지불했다고!’
‘열 페이지가 넘도록 그림 한 장 없다니!’
‘맥 끊기게 자꾸 괄호가 나오는 거야!’
‘이 이야기는 벌써 다른 책에서 이미 몇번 소개된 내용이잖아!’
이렇게 마음속의 빨간펜을 꺼내 한판 토마토 축제를 벌이고 만다. 교직에 있는 분들이 잔소리 많은 것과 비슷한 일종의 직업병일 것이다. 게다가 외국에 나가도 서점부터 들리는 책 수집광에 속독가인 필자는 어지간한 책에서 감동은 커녕 새로운 내용 찾기도 힘들다.
아무리 감동스러운 이야기도 한번 듣고 나면 그저 그런 이야기가 되듯, 새로 구입한 책에서 어디서 읽은 내용이 나올 때마다, 슬슬 이산화탄소와 딴생각이 머리속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이는 책뿐만이 아니다. 세미나나 워크샵에 가보면 같은 분야의 다른 발표자들의 발표자료의 슬라이드가 겹치는 경우도 태반이다. 이런 경우 청중인 필자가 오히려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비슷한 분야의 사람들은 책 또한 비슷하게 읽는 경향이 있음을 잊어 발생한 촌극일 터인데, 그 덕분에 비슷한 분야의 사람들이 사례로 인용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한결같다. 인용은 필연적으로 나열을 낳는데, 나열은 정보전달 방법 중 가장 하품 나는 수단이다.
이런 경우 독서가 오히려 사람을 뻔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독서광들이 보통 지루하다는 선입견은 그냥 생겨난 것만은 아닌 듯 싶다. 언제부터인가 책 읽는게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게 되었다.
스티브 잡스와 프리젠테이션
스티브 잡스의 발표 기술은 출판계에서 꽤나 주목 받는 아이템이다. 일목요연하게 말하는 방법에서 쌈빡한 슬라이드 만들기, 의상, 연출에서 손짓에 이르기까지 스티브 잡스가 새로운 제품을 발표할 때마다 그의 발표 동영상은 폭발적 관심 대상이 된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자. 똑같은 대본과 의상 그리고 몸짓인데 스티브 잡스가 아닌 아나운서나 전문 배우가 한다고 해보자. 아마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발표가 감동적인 것은 스티브 잡스가 직접 발표하기 때문이다.
<사진 2> 2014년 동계 올림픽 유치전에서 평창은 실사 평가에서 가장 좋은 점수인 액셀런트를 받고서도 그보다 못한 러시아 소치에게 유치권을 내준 것은 발표자의 발표 기술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스티브 잡스가 감동적인가? 그가 애플의 창업자이자 엔지니어로써 소개하는 제품과 서비스의 디테일한 것까지 기획하고 고민하고 토의해서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잘 연출된 TV쇼처럼 철저한 준비와 계획 하에 재미있고 효과적으로 잘 전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발표를 보면서 찍어야 할 방점은 ‘발표 참 잘하네’가 아니다.
자신있게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스티브 잡스의 발표가 아니더라도 필자는 그런 감동적인 발표를 주위에서도 심심치 않게 보기 때문이다.
바로 최일선 엔지니어들의 세미나를 들을 때다. 이들은 들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해본 이야기를 한다. 직접 해봤기 때문에 그야 말로 생생하고 신뢰할 수 있다. 발표장에서 가장 들을 만한 발표는 현장 엔지니어가 발표자인 경우다.
마케팅 부서에서 나온 사람들의 발표는 슬라이드는 화려할지 몰라도 둥글둥글해 끝나고 나면 남는 이야기가 적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발표는 그들의 바램과 전망이 많이 들어가 있어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도통 신뢰할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후방에 있는 사람들의 발표는 예외 없이 감동이 없다.
어느날 필자는 운전시 안전벨트를 잘 매지 않는다. 딱지를 몇 장 떼여도 마찬가지다. 먼 이야기로만 느껴지는 생명벨트니 하는 캠페인이나 처참한 교통 사진도 안전벨트의 번거로움과 갑갑함을 이겨내지 못한다. 그런데 안전벨트를 만드는 자동차 부품회사 엔지니어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착석과 동시에 저절로 안전벨트를 매게 되었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채로 시속 40km/h에서 자유 충돌하면 운전자는 즉사합니다.”
<사진 3> 스티브 잡스의 발표가 감동스러운 것은 그의 발표기술 때문만이 아니다.
사망사고를 숱하게 본 듯한 그의 무미건조한 표정과 차분한 어투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운전석에 앉을 때마다 떠오른다. 해본 사람의 이야기는 꾸미지 않아도 강한 전달력을 가진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는 목적지를 돌아가는 것처럼 느리고 도통 와 닫지를 않는다.
독자를 재우지 않기 위한 작은 조언
모처럼 준비한 발표가 청중의 숙면으로 마무리되었다고 ‘스티브 잡스의 발표 기술’류의 책을 아무리 읽어봐야 사실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안서나 보고서가 엉망이었다고 한들 ‘베테랑이 들려주는 제안서 비법’, ‘어디서 통하는 보고서 작성법’ 같은 종류의 책을 읽어봐야 역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생각만큼 글이 써지지 않으면 포장지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우선 경험을 쌓는 것이 우선이다. 경험도 힘들다는 소리가 저절로 날 정도의 고생을 겪어야한다. 책상에 앉아 클릭하여 얻은 정보로는 나열 수준의 글 이상을 써내기 힘들다.
고생한 사람의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군대이야기도 후방보다 전방에서 복무한 이들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고생을 한 사람들은 호불호가 있고 나름의 답을 얻어 편견을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재미있는 이야기꾼들 또한 호불호가 선명하고 대체로 빠른 정답 즉 편견을 가지고 있다.
또한 타인의 경험담은 언제나 새롭다. 자신이 경함한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는데, 기존에 들어봤을 리가 없다. 동시대에 같은 걸 보고 듣더라도 저자의 삶이라는 맥락이 다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경험담은 없다.
필자에게 다시 책읽기가 즐거워진 것은 에세이, 즉 경험담의 재미를 알게 된 즈음부터로 기억된다.
글이 별로인 사람들 보면 글솜씨의 문제라기보다도 해당 분야에 아직 핵심이 아니고 고생을 별로 해보질 않아서 정리도 잘 안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실은 없는데 멋만 내는 사람을 보통 날라리라고 부른다. 진짜 명품은 내공에서 살짝 살짝 풍기는 고수의 여유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것은 일시불로 결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사진 4> 에스콰이어가 2010년 최악의 드레서 중 한 명으로 뽑은 마크 주커버그. 공식석상에 아디다스 슬리퍼를 저렇게 멋지게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에스콰이어 독자 중엔 없을 것이다(사진출처 : http://youwillget papercuts.blogspot.com).
경험이 좋은 글을 만든다면,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들려줄 수 있는 마지막 작은 조언은 소작이다. 적게 가끔 쓰라는 말이다. 개인이 경험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물리적 시간적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작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들은 이야기를 적을 수 밖에 없게 된다.
- Reference
http://www.imaso.co.kr/?doc=bbs/gnuboard.php&bo_table=article&wr_id=36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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